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1세 (문단 편집) === [[플랑드르의 마틸다]]와의 결혼 === 1050년에 20대 초반이 된 윌리엄 1세에게는 자신의 숙부들을 포함해 노르망디 공작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이 많았다. 윌리엄은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리인을 보내 옆동네인 [[플란데런 백국]]의 공녀이자,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인 당시 19세쯤 된 [[플랑드르의 마틸다]]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하지만 마틸다가 "'''종년의 사생아''' 따위가 어딜 감히?"하면서 청혼을 거절한다.[* 사실 마틸다가 이런 말을 할법도 했는데 일단 외가쪽으로는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였으며 친가인 [[플란데런 가문]]쪽으로는 무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대제]]와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엄청난 혈통의 고귀한 신분이었으니, 평민 소생의 사생아 출신인 윌리엄이 눈에 안 찰 수도 있었다.] 이에 윌리엄은 복수하겠답시고 플란데런으로 달려갔다. [[https://blog.naver.com/darkr11/222373754156|#]] 플란데런에 도착한후 마틸다를 만난 당시의 상황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교회에 가던 마틸다를 만났다는 설과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쨌든 열받은 윌리엄이 마틸다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아다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두들겨팼다는 점은 변치 않으니까. 윌리엄 1세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마틸다에게 분노하여 그녀를 공개적으로 폭행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연히 마틸다의 아버지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 ^^(1012년 ~ 1067년)^^[*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매부이자 이후 [[필리프 1세]]의 섭정까지 되는 당대에 손꼽히는 권력자였다. 그가 다스리는 [[플란데런 백국]]은 나중엔 항구도시 칼레 한 군데에서 걷는 관세만으로도 잉글랜드 왕국 전체 세입의 1/3이 충당될 정도로 부유한 곳이었다.][* 고대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적어도 독립 백작 이상부터는 등작 자체보다 인구나 자금력이 위세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예를 들면 카페 왕조의 초대 국왕인 위그 카페도 원래 파리 백작이었다.]는 윌리엄이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것을 보고, 눈알을 허옇게 뒤집고 "이 호로새끼가 감히 내 딸을 때려?!"라며 칼을 뽑아 윌리엄을 죽여버리려 했다. 그 순간 마틸다가 앞을 막아서면서 외친 말은 "이 남자 아니면 절대 누구와도 결혼 안 하겠다!"였다. 그리고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4년 뒤 '''진짜로''' 결혼했다. 물론 그 동안의 엄청난 반대와 방해공작 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두 사람은 마틸다의 아버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교황]] [[레오 9세]]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했다. 교황이 반대한 이유는 윌리엄과 마틸다가 먼 친척이라 근친상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로베르 2세]]의 딸로 프랑스의 왕녀였다. 윌리엄의 백부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와 결혼했다가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이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딸 마틸다를 낳았다. 또한 윌리엄의 아버지인 '''악마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유디트, 유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였는데 이 조프루아는 선대 앙주 백작 풀크 2세의 아들이었다. 풀크 2세는 조프루아 1세 외에도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의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이고 콘스탄스는 '''경건왕''' [[로베르 2세]]의 딸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윌리엄의 할머니인 부르고뉴의 유디트와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이 같은 외증조부를 둔 외가 쪽 외삼종자매(6촌)이고,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라, 가톨릭 못지 않게 보수적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도 그냥 남으로 쳤을 관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6촌 이상 넘어가면 사실상 남이고, 당연히 11촌 정도면 결혼도 문제가 없다.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는 7촌 고모인데 문제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외가 쪽에는 살짝 널널하긴 했다.] 그런데 [[교황]]은 이를 두고 [[근친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사촌간 혼인]]도 흔한 유럽 귀족가에서 11촌의 혼인 반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레오 9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계 교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원론적 입장에서 근친상간을 반대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노르만 본진의 수장인 윌리엄이 플란데런 백국의 힘을 얻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정확히는 당시엔 교황청이고 동로마제국이고 하나같이 행패 심한 노르만을 경계하고 싫어했던게 사실이다. 당시 [[레오 9세]]가 다스리는 교황청은 지브롤터를 넘어 이탈리아 남부를 위협하는 [[노르만족]]에게 계속 침략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1053년에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여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가[* 당연하지만 이 당시 노르만족도 가톨릭을 믿었으므로, 영적 지도자인 교황을 함부로 대하진 않고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물론 교황 입장에서는 인질이 되었음은 사실이니 매우 고까웠겠지만.]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간신히 로마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만 오래 살지 못하고 1054년 4월 19일에 선종했다. 그러나 이 결혼을 지지하던 루앙의 대주교이자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의 남동생이기도 한 윌리엄의 숙부 모지는 교황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을 주관했다. 이 구설수를 무마하고자 이들 부부는 [[성당]] 두 채를 지어 헌납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인정했다.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아들 4명과 딸은 최소 5명 이상 낳았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남편을 위해 개인재산까지 털어서 '모라'라는 이름을 붙인 배를 선물했다고 할 정도니[* 이 배는 잉글랜드 침공 때 윌리엄의 기함이 되었다.] 둘의 첫 인상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다. 윌리엄에게 내연녀나 혼외자식이 있다는 증거도 없고, 딱히 추문도 전해져 내려오지도 않는다는 점도 부부관계가 좋았음을 의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